희망을 위한 찬가 느낀것

희망을 위한 찬가

연재:문피아 작연란
작가:카이첼
전작:클라우스 학원이야기, 남겨진아이 버려진아이,이계인,마법서 이드레브
 

영웅의 몰락으로 인해 변해버린 절망가득한 세상이라 불리는 이름의 평원에서 하늘을 향해 홀로 부르지르며 외치는 절규.
그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부르는 희망을 위한 찬가.

처음에는 주마간산식으로 읽었고, 두번쨰는 어렵다는 생각에 천천히 읽었다. 그렇게 묵혀놓다가 매너리즘에 빠져 시큰둥했던 내 자신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찾게 된글. 아마도 글을 읽는 다는것은 내 자신의 여유에 따라서 달라지나보다. 판타지로서의 호쾌함과 대리만족에 지쳐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글에 식상해져서 색다른 즐거움을 위해 읽은 것은 부인할수 없지만 단지 그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희망을 위한 찬가(이하 희망찬)는 고등학교의 평범한 학생들의 이야기와 그속에서 판타지로써의 전투, 지금의 세대에에 대한 여러가지 시각들이 표현되어 있어서 소설로써의 재미또한 갖추고 있다.

아직 글이 완결이 되지 않아서 감상을 쓰기에는 섣부른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글을 읽는 재미와 책에 대한 정보까지 얻는 날도둑의 심보를 반성하는 의미에서도 이렇게 나마 적어볼까한다. 나중에 완결이 된다면 그떄는 책으로 구입해서 볼까 생각중이지만,확답을 할수는 없으니^^;;

◎이야기 줄거리
1997년 거대하고 알수 없는 악의(당시의 우리나라에는 IMF사태가 있었다.)에 은결의 아버지인 수행혼자 맞서 싸웠다. 그 거대한 악의는 사라졌지만, 수행마저 몰락하고 만다. 그 후 세상을 바라보며 아버지마저 몰락시킨 그 악의에 맞서기 위해 자신 스스로를 채찍질해가며, 영웅인 아버지 혼자만의 몰락때문에 세상에대한 믿음을 버리고서도 절망속에서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배경과 소재
작가는 현대 시대인 도천시라는 가공의 도시를 만들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미 지금의 시대는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판타지로써의 일들이 판을 친다. 뉴스나 일련의 일들이 얼마나 판타지적인가 말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현대의 배경에 진행되는 일들은 판타지를 섞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희망찬은 판타지와 현실을 절묘하게 결합해 읽는이에게 진짜로 이런일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깔끔하다. 소설을 읽을떄 설정이라는 것이 소설전체에 서술적으로 묘사되어 있는것은 읽기에 불편하고, 억지스럽게 강압적으로 주입시킨다는 느낌을 받게하는데 희망찬은 여러 설정들을 글속에, 대화속에, 유머로써 풀어낸다. 필력이라는 말이 세삼 와닿는다.

하지만 글 에서 나오는 인문학에 관한 설명이나 개념에 관한것이 쉽다라는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것들을 하나의 장치로 쓰는 것 같기에 완결떄까지 판단을 미루어 놓는것이다.

주인공인 은결과 아버지인 수행이 사용하는 힘-기호에 관련된 '역장과 진'-이라는 것 역시 흥미롭다. 기호에 관련된 역장과 진이라는 것은 도식된 기호와 관련된 수식의 힘이라고 생각을 할떄 여타의 판타지에서 나오는 마법의 법주와 다른것 같지만, 마법역시 진리를 탐구하여 체계적으로 어떤 힘-그것이 마나던 다른것이던-을 체계적으로 도식화해서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하겠다. 그렇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요즘은 이적을 다루는 이들이 깽판을 치는 글들이 난무하기에 어처구니 없는 글에 대한 분노가 치밀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 어쩌면 나의 독서의 방법이 미숙한 증거일수도 있기에 넘어가기로 하자.)

거기다 이들이 다루는 에너지의 양으로 본다면 벌써 무슨 사단이 나도 벌써 났을 테지만, 이들은 그런것을 우려해 자신들의 외부의 세계에 피해를 주는것을 자신들의 힘을 제한하거나 피해를 막는 방법으로 개연성의 파괴를 초래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것에 대해 작가의 고심의 흔적이 보인다. 이런 이유로 주인공인 은결과 주변의 인물들의 능력은 제약이 많다. 글 초반에 은결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미숙하기에 생기는 도로파괴는 굉장히 재밌던 에피소드로 기억에 남는다.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주인공의 나이가 고등학생이라는 것이다. 전작이었던 '클라우스학원이야기'역시 학원물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학원물을 좋아하는 작가일것도 같지만, 그런 관점보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시간이 왜 지금인가? 라는 것이 신경이 쓰인다.

은결은 학교생활이 이미 필요치 않는 캐릭터다. 지식은 이미 철학이나 다른 인문학분야를 전공한 사람들과 토론이 가능할정도로 쌓여있고, 가진바 자신의 능력-사념체를 제거하는-역시 또래의 같은 일을 하는 이들과 비교할바 없다. 있다면 쿠로사카 정도? 학교를 다니는 이유가 평범함을 가장하기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인 수행의 바람인지는 모르지만, 고등학생2학년인 은결에게 초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은 그저 그런 시간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지금은 이전과의 그런 시간들과 다르다. 은결에게도 변화라는 것이 찾아온다. '친구'라는 의미가 너무나 광범위하기에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동물 3총사와 민성이라는 친구가 은결에게 생긴다. 거기다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자신과 공유할수 있는 것이 있는 또래인 쿠로사카가 전학을 온다. 이것도 부족해 여자친구인 세연까지(블루한 은결에게 희망이 찾아오는 것 같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며 왜 제목이 희망을 위한 찬가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며 혼자 상상을 해봤다. -_-;;).  

이렇듯 은결은 지금까지 겪어 왔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확장되어져 버린다. 여러가지 일들을 겪고 생각해 왔던 것들이 조금씩 유해지는 느낌이다. 이것들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작가의 의도는 아직 모르겠다. 아니 혼자만의 오해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상호텍스트적 독서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다만 나중에 완결이 된다면 아마도 이에 대한 물음역시 답을 얻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답해볼뿐이다.

기호학에 대해 조금 알아보니 '아담의 언어'라는 것에 대한 기호학(서지학??)자들의 염원은 실제로 은결의 염원처럼 있어왔다고 한다. 수행은 젊었을때 이러한 것들의 모든 체계를 이루었다니 어째서 작가가 '수행이래'라는 말을 쓴건지 어렴풋이 알것같다.

◎인물
은결이라는 주인공의 능력을 본다면 이런 다재다능한 녀석이야 말로 먼치킨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로써 생긴것도 준수하고, 알고 있는 지식의 양또한 방대한데 그것을 사용할 방법까지 갖추고 있다. 거기다 육체적인 능력까지 최고다.
그렇다면 다른이를 배려한다는 것이 부족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캐릭터가 등장할법도 하건만, 마치 작가는 그것을 절대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듯이 '수행'이라는 전설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인물을 화산활동으로 생긴 천연의 장벽처럼 세워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같다.

자신의 영웅인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에 교만해질수 없고, 그런 아버지가 웃으며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은결에게 미소를 보여주는 대목에서 정말 슬펐다.)거대한 악의에 맞써 싸운모습을 보았기에 다른이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불안불안하다. 이 녀석이 폭주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글의 긴장감을 만든다. 그러다가 은결의 세상과 동조할떄 글의 긴장감이 폭발해버린다. 그것은 슬픔인것 같다. 결국 희망을 위해 길을 찾아가다가 길의 막대함에 먹혀버린듯 하여 더욱 아득하다. 거기다 카미에게 잠식당하면서 다른이의 시선으로 본 자신의 모습을 듣는 모습에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목숨을 노렸던 쿠로사카에게 더욱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는 것이나 친구들을 만나며 외로움을 토로하는 모습들을 보면 아직은 어린듯한 모습들도 보인다. 여기서 희망찬의 또다른 즐거움인 여타 성장소설들의 역경을 해쳐나가며 성장하는 캐릭터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나중에 어떤식으로 이 캐릭터가 성장해나갈지가 기대된다.

쿠로사카는 이글에서 하나의 전환점과 같이 등장한다. 은결에게는 한명의 새로운 조력자일뿐만 아니라 어떤의미에서는 진정한 친구로써 은결과는 다른 날카롭게 벼려진 칼과 같은 이미지로써 등장한다. 하지만 쿠로사카 역시 은결을 만나고 변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 역시 이글의 매력이다.

그렇다고 가치관이나 성격등이 태풍앞에 갈대처럼 이리저리 체이듯이 변화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의 능력과 지식이 아무리 대단한것이어도 이들은 아직 어리다. 그렇다. 이들은 아직 경험할, 체험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렇게 아이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성장해나간다는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목이 언뜻 스쳐지나간다. 이들이 아직은 성장해나가는 시간이기에 아마도 작가는 제목을 희망을 위한 찬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푸른이빨의 캐릭터는 굉장히 시니컬하면서도 유머스럽다. 인간이 아니기에 오히려 인간에 대해 객관적일지도 모르는, 오랜시간을 살아(봉인)오며 그에 대한 지식역시 적지 않을테고, 인간의 어떤 사상이나 가치관에 자유로운 캐릭터의 등장은 마치 비평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캐릭터의 역활이 시니컬하기만 하지는 않다. 푸른이빨과 은결,세연,수행에 관련된 대화나 에피소드들은 웃음을 준다. 글 자체만의 즐거움이다. 이것은 전작인 클라우스와는 다른느낌이다. 여유, 혹은 관록, 음...경험이라고 해야할까?

간혹  그 글의 작가가 재미를 위해 유머를 사용하지만 그것들을 전혀 공감하지 못한 경우가 있어서 그런 방법은 썰렁할 뿐인것에 비하면, 글을 읽다가 피식웃게 만드는 것은 텍스트를 짓는 것을 즐길려고 하는 작가의 필력중 하나일것이다. 글을 읽은 독자들의 리플이나 관심이 푸른이빨의 활약에 일희일비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캐릭터는 분명 성공적이라고 할만하다.

동물3총사와 민성, 세연, 미래등등...작가가 대중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가 보이는 캐릭터들이다. 미래와 세연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내가 남자이기에 미소녀들을 사랑스러워 하는것은 단연코 아니다. 절대. naver!!-_-a.  
글의 주인공인 은결이 굉장히 블루하기에 글 전체적인 분위기가 블루할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이 글이 상당히 밝은 느낌을 주는것은 이런 캐릭터들이 그런 블루한 분위기를 그만큼 희석시키기에 가능할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또한 이들은 글 전반적으로 나오는 인문학-이것은 주인공인 은결이 사용하는 역장과 진이 기호학에 관련된것이기에 당연히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에 관련된 지식들을 독자에게 풀어주는 작가의 장치로써도 한목한다는 점이다.

나에겐 이들의 대화가 굉장히 즐거웠는데 기차에서 여행을 떠날때 했던 게임들이나 미래와 은결의 대화, 쿠로사카와 은결의 대화, 여우와 은결의 대화같은 일련의 대화나 이들의 생각들이 이 글을 읽는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고맙다. 글을 읽는 것에 대한 지식의 강요로써 주입되는 것이 아닌 이들과 같이 어렵지만 그 속에서 생각하고 이해되는 것들로 나에게 읽히는 것을 보면 분명 이글의 대중화가 나에게는 성공적으로 작용했다. 은결균으로 대변되는 에피소드는 나역시 은결균으로 침식당할 만큼 정말로 즐겁다. 앞으로도 이들과 관련해서 어떤 에피소드들과 글의 마무리가 진행될지도 관심사중 하나다.  

◎분위기
글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여러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그 중에 주인공의 성격이나 그에 관련된 생각들은  글전체적인 분위기에 큰 영향을 준다. 안그래도 지금 살고있는 세상이 결코 밝다고만 할수 없는 나에게 즐거움을 느끼기위해 읽는 글마저 어둡다면 글을 읽기전에 한번쯤 망설일것이다.

그런측면에서 본다면 희망찬은 그런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인 은결은 '블루Blue'라는 말로 모든 설명이 가능할정도로 글 중에서 단연코 암울한 캐릭터다. 하는 말이나 행동들에서 다소 밝은 분위기를 풍기긴 하지만 은결을 이루는 결정적인 사고는 '아담의 언어'를 궁극적으로 추구하기에...그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알기에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차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은결은 blue그 자체로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우려를 말끔하게 날려버린다. 바로 주인공이 아닌 다른이들로써 그런 어두움을 가시게 해준다는 점이다. 글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다면, 캐릭터를 활용해서 그런 분위기를 희석시킨다. 이점이 희망찬의 장점이다. 간혹 캐릭터가 암울한 분위기를 풍긴다면 글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그에 따라 끌려가기 마련인데, 이글은 그런것들을 캐릭터로 희석화 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소위 팔리는 글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희망을 위한 찬가들 부르기 위해선 절망으로 뒤덮인 세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희망을 부르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 주체는 누구일까? 내가 생각하는 은결일까? 아니면 이글을 읽는 독자들? 사념체를 상대하는 이들은 MLB에서 나오는 요원들처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영웅이 될수 없다. 기억되지 않는 이를 영웅이라고 할수는 없지 않을까? 이들을 기억하는 이 하나 없는데 이들이 희망을 위한 찬가를 부른다고 해도 다른이들에게는 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작가는 은결과 다른이들을 통해 절망이 뒤덮인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걸까? 전설(영웅)마저 몰락하며 결국 어쩔수 없다라는 것일까? 아니면 절대적인 존재에게는 한없이 작은 존재에 불과한 인류가 '손'으로 대변되는 독립/자주성을,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위한 찬가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려는 걸까?

글의 완결이 가까울수록 더욱더 궁금해지고 기다려진다. 내가 가진 의문은 나만의 오해일수도 있다. 하지만 수행이 아들인 은결에게 전해주는 "폴 발레리를 기억하렴"이라는 문구처럼 오해는 이 글을 읽는 내게 풍요를, 또 다른 즐거움을 줄것이라 믿는다.  

◎마치며...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글이기에 쓰기가 힘드네요. 글전체에 나오는 여러가지 철학들에 관련해서는 아는 것이 없기에 그저 저만의 깜냥으로 감상을 적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찬 위선가득한 단어들의 나열로 이루어진 감상이라는 것은 너무 저열하다고 생각하기에... 그저 지금 제가 느낀 감상을 적은거니 이런 무식한녀석!! 하고 피식 웃고 넘어가 주길.^^
작가가 의도한 여러가지 복선들과 장치들을 완결되지 않은 글을 읽고 발견할정도로 저는 좋은 독자가 아닙니다. 작가의 텍스트를 읽기엔 저는 아직 상호텍스트적인 독자가 아닌것이 아쉽네요. 완결된 이후로도 알수있을지는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아쉽습니다. 글을 읽는 즐거움이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완결이 나고 저역시 지금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생기고, 여유가 생긴다면 언젠가는 지금 느끼지 못한 즐거움을 알 날들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글을 읽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말이죠^^ 어렸을때 읽었던 책과 지금다시 읽는 책의 느낌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긴글 읽어준 분들꼐 감사드립니다.그리고 이글을 읽는 즐거움을 준 카이첼님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칩니다.

ps1.그나저나 막상 쓰고나니 무척 길어저버린...머냐 이 휠의 압박은...확실히 지금의 나에겐 글의 양은 무지의 소산이다.-_-a...
문피아에 올려볼까 했지만, 두렵다.-_-a. 먼가 작가의 텍스트를 내가 읽지 못한 듯의 느낌. 왠지 오해로 가득한 글같다. 이것이 나만의 감상인지 다른이들이 쓴 감상글의 오마주인지 자신이 없다. 조금도 손을 본후에 올려도 올려봐야겠다.
ps2.은결 이 굇수녀석!!!!!!

덧글

  • 지나가던행인A 2011/02/28 01:25 # 삭제 답글

    감상 잘읽으셨습니다
    이해는 잘 못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작품에대한 평가를 미루시는모습이 참 보기좋으시내요
    저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채 완독했고 2년뒤에서야 다시 읽고 이해했습니다.
    저의 평가는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입니다. 한번꼭 다시읽으시기를 추천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